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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만 되면 생각나는 일들

하부에노 2023. 6. 5. 11:02
   
    6.25만 되면 생각나는 일들.
    73년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국군 용사들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이제는 밤하늘의 별들이 되어 희미한 역사 속으로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 겪었던 6.25 사변은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는 진기하고 신나는 <병정놀이>였다. 전쟁이라는 난리 통 속에 어떻게 하여야 내 가족이 살아남아야 하는 걱정 꺼리는 어른들의 몫이었고 부모님이 차려주는 보리밥이라도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고 학교도 않가고 노는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전 현대 근대사를 강의하는 C일보 기자 출신의 K모 인사가 인터넷에 올린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 맞으니 믿으라고 하는 주장을 논박한 강의를 접하고 30여 넌 전 읽었던 소설집을 먼지 앉은 책장에서 꺼내 10권까지 밤늦도록 재독 하였다. 오래전에 출간된 책자여서 지질은 갱지처럼 퇴색하였고 활자의 크기까지 작아서 이제는 나이가 들어 돋보기를 써야 읽을 정도의 옛날 제본이다. 옛날에 첫 번 읽었을 때와 감회가 새삼 다르다. 전쟁사(戰爭史)를 읽다 보면 유사 이래 수 많은 생명이 조국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당을 위하여, 총통을 위하여, 각하를 위하여, 페하를 위하여, 대원수를 위하여. 수령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참혹하게 죽어간 장면 장면들을 안락한 장소에서 편히 읽노라면 이름 모른 산하(山河)에서 피아 (彼我)를 불문하고 산화(散花)한 영령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먄약 내가 그때 그 나이에 그런 환경에 처하였다면 어떤 처신을 하였었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하여 본다. 국방군의 후퇴와 인민군의 남진 그리고 3개월 후의 국군과 UN군의 반격 행렬은 상상 이상으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그 후 마을 악동들 어떤 놈은 연락병이 되고 어떤 녀석은 소대장이 되고 어떤 놈은 국군으로 어떤 놈은 인민군으로 편을 짜서 군인들 전투 흉내를 내는 병정놀이를 저녘 끼니를 차려 놓고 찾아 나선 엄마들의 재촉이 있을 때 가지 신나게 놀았다. 일제 강점기나 8.15해방 전후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나 신식 문물을 먹은 부호들의 자식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여야 지식인 대접을 받었 시절이었다. 농노 취급을 받던 소작(小作)인 들에게는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기 쉬운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토지개혁 소문은 지주들에게 억압받던 작인들 에게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한다는 소식에 사로잡힌 무산계급은 열광하였고, 제국주의 억압보다 혁명적인 마르크스나 레닌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혁명적 사조(思潮)였었다. 어린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도 기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어설픈 이론을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사도행전 2장 44,45절)>. 지리산 줄기 끝자락 경남 전북 전남 3게 도가 만나 자리한 남원군 운봉면은 해발 500M 분지다. 앞마당에선 지리산이 보이고 조선 말에는 현감이 있던 곳이다. 일제 시 중추원 참의를 지낸 만석군 박 모씨는 고래등같은 기와집 본가와 건너면 작은 동산에는 사정(射亭)을 지어놓고 진입 도로 양변에는 벗 꽃나무를 심어 봄철에는 아마 창경원 다음 가는 풍광이었다. 지금은 한국에도 관광지마다 벚꽃이 만개하여 방방곡곡이 꽃동산이다. 면 소재지에서 술도가를 차려 부자가 된 부잣집 장남이었던 박 모씨는 일찍 공산주의에 심취하였던 터라 인민군 선발대가 들어오자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우리들은 그 밑에서 전사 하리라....> 면 소재지 신작로 큰길에서 붉은 깃발을 흔들며 환영하였던 장면과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인 붉은 깃발의 환영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박모씨는 UN군 북진 때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 즉 공비가 되었다. 한 참 후에 일이지만 박 모씨의 장모님인 노파는 시골에서 보기 드믄 커다란 기와집에 살고 있던 터라 서남지구 경찰 공비토벌대인 205부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 노인의 둘째 딸은 그녀의 집에서 근무하는 이북출신 전투경찰 최모 경사와 눈이 맞아 결혼하였다. 큰사위는 빨치산, 작은 사위는 그들을 소탕하는 전투경찰인 두 사위를 둔 기구한 운명의 노파가 되었다. 그 시절의 젊은 청춘들은 삶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발한 혁명적 사상이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실감 나게 묘사되었다.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좌익 염상진 형과, 우익 동생 염상구 형제의 대립 설정의 가족사가 판에 박은 것처럼 닮은 현상이 우리 고장에서도 있었다니.... 소설 속에 등장하는 250여 명의 인물들이 작가 특유의 필치로 허구를 사실화한 대화는 남도 특유의 감칠맛 나는 사투리여서 친밀감을 더하는 작가의 기량이 엿보인다. 5.16혀명 후 전남 조선대학 재학생 중 징집 영장을 받고 입대하여 빵빵 군번을 받고 임진강변 155m 포병부대에서 함께 군 복무한 전우 황무연(가명)일병의 읊어대는 찰진 전라남도 사투리의 욕설이 숨도 안 쉬고 줄줄이 나오던 사설(辭說)과 오버랩 된다. 북한군 점령 인공(人共) 치하 때,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찬 둘째 누나의 시골 초등학교 때 은사가 수차례 찾아와 혼기가 꽉 찬 미혼인 누나에게 여맹(女盟)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던 장면도 어쩌면 그 소설에 묘사된 장면과 일치한 것이 신기하기 만하다. 인민군 여군 선무공작대는 저녁이면 마을 꼬마들을 모아놓고 김 일성장군의 노래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구비구비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를 열심히 가르첬다. 어제 먹은 점심은 생각이 않나는 나이가 되었지만, 70여 년 전 유년기에 국방색 바탕에 빨간, 노란 금줄이 박힌 멋진 군복을 입은 여자인민군 공작대가 가르쳐 준 그 노래는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하다. 흰 저고리, 검정 치마. <몸뻬>만 입고 살던 시골 여인들의 옷차림만 보던 눈에 스커트 차림의 여군복은 어린 눈에도 이국적인 매력을 느꼈었나 보다. 마을을 접수한 선발대의 인민군 한 전사는 군복을 단정히 입고 위장막이 수놓아진 인민군 전투모를 쓴 그의 인상은 호인처럼 보였다. 그는 어슬렁거리면서 마을을 순찰하였다. 멱감고 헤엄치던 동네 개천 깊은 소(沼)에 그가 메고 가던 딱꽁총을 소에 발사하면 진동에 마비된 피라미 새끼 떼가 물 위로 하얏케 떠오르고 개구쟁이들은 신나게 물고기를 신고있던 고무신 짝에 건져 담던 기억이 새롭다. 그 전사는 심심하면 공포를 쏘아 댓고 그 총성의 메아리는 마을 어른들의 가슴을 휘저었다. 그 인민군 뒤를 무서움 없이 졸졸 따라가던 꼬마들은 따끈따끈하고 화약 냄새가 밴 샛노란 놋쇠 탄피를 주어 모으느니라 그 인민군 아저씨가 더 총을 쏘아대기를 바랐다. 전세가 역전되어 UN군이 반격하자 패주하던 인민군 전사들은 신작로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서 후퇴를 하였고 군관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사병들을 앞지르며 북쪽으로 내 달렸다. 곧이어 비포장 국도를 따라 UN군의 진격 행렬은 황색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였다. GMC 대형트럭엔 공기 정화조가 옆구리에 달린 구형 방독면을 쓴 흑인 운전 병사의 모습은 전투기 조종사의 산소마스크처럼 보였다. 인민군이 들어 올 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던 흰 한복 차림의 동네 어른들은 또다시 유엔군 진격 행렬을 향하여 목이 터지게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기회주의 현상을 전쟁터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인민군이 썰물처럼 후퇴한 후 감악재 밤나무골을 가는 도로변엔 인민군이 타고 가던 사이드 카(이륜 오토바이에 옆에 바퀴 한 개를 덧붙인 3인승 오토바이)가 신작로 갓 논두렁에 나 딩굴어 있고 죽어 자빠진 인민군 병사의 시체 콧구멍에선 하얀 구더기가 쓸어 있어 구더기 뭉치가 왈칵왈칵 꿈틀 때마다 그가 숨을 벌떡거린 것처럼 무섭게 징그럽게 보였다. 육이오가 발발한지 73년이 지났건만 전쟁의 참상은 어찌하여 지금껏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걸까? 휴전이 성립되고 고등학교 시절 아침 조회시간마다 가죽 견장을 허리에 두른 학생 간부가 연단에 올라 외치던 구호 <우리의 맹세>가 ‘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로 조회는 마감되었다. 백두산 영봉을 93년도 8월경 중국을 통하여 올랐으나 그때 백두산 천지 앞 영봉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사진을 찍고 왔어야 했다는 허망한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20여년 전 북한 관광 길에 북측 판문각에서 남한 측 자유의 집을 내려다보는 감회는 조국 분단의 찹찹한 심정으로 지금도 쓸쓸히 남아있다. (판문점을 안내하는 인민군 장교와 필자) 북한 땅에 머무르는 동안 남한의 중학생보다 왜소한 휴가 나온 인민군인들의 모습을 평양 부흥역 지하철 에스칼레터에서 많이 지나쳤다. 안내원은 군인을 향하여 사진을 찍으면 않된다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판문점에서는 인민군 전사나 군관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끝- 자료 화면 Google 캡쳐 6.25 노래 https://youtu.be/1g6Vp7azHug?t=38 수필가 윤 봉춘 뉴욕 일보에 기재된 윤봉춘님 수필